소설/2019

[세하유리] 용서해주소서 03

애쿼머린 (루이벨라) 2019. 11. 19. 17:37

마피아 세하 x 수도자(수녀) 유리

정확한 연도나 지명까지 자세히 하기엔 귀찮아서 그냥 뭉그러뜨립니다.(ex 북서쪽 섬나라, 남쪽 반도 등등)

위상력은 없지만 그에 준하는 마법 같은 건 있다는 판타지 세계 설정

아마도 중편 예정

 

 

 

 

 

 이 지역의 5월은 아름답습니다.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세하는 유리가 말한 자신은 이 장소에서의 5월도 싫지 않다.’ 라는 말이 그렇게 투과되어서 들렸다. 아마도 그 앞에서 말한 이 지역의 7월은 너무도 아름답거든요.’ 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같이 엉켜들어간 것 같았다.

 

 아무튼 임무 때문에 잠시 들렀다 갈 장소였지만, 이런 말을 듣고 나니 세하는 하루에 잠깐씩 산책하는 시간마다 바깥 풍경을 괜히 눈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눈 여겨 보니 유리가 했던 말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갈 듯 했다.

 

 ‘과연...’

 

 이 수도원 주변을 감싸고 있는 자연 자체가 아름답다. 그래서 수도원이 아무도 살지 않는 절벽에 홀로 위치해있다는 것도 잠시 잊게 해주었다. 허나 감상자의 초보인 세하가 보아도 약간의 싱그러움은 부족한 듯 하다. 이 지역의 7월은 싱그럽기에, 무척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칭송받는다.

 

 수도원에서 눈을 뜬 지 3일의 시간이 지났다. 유리의 말로는 자신과 만난 날이 5월의 첫 번째 날이라고 했으니, 오늘은 5월의 여섯 번째 날쯤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세하는 수도원에서 유리 이후로도 유리를 만나면 인사와 가벼운 대화 정도는 나누었다 - 이외의 수녀를 처음으로 맞닥뜨렸다.

 

 처음 맞닥뜨렸다고는 했지만 서로 초면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하가 이 수도원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유리 옆에 같이 있었던, 상당히 격식 있는 말투를 가졌던 수녀였기 때문이다. 세하는 곧 이 사람이 이 수도원의 수도원장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그 나름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서인지 조금은 딱딱하게 인사가 나갔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

 

 아예 저쪽에서는 대꾸도 안 하고 있었지만. 세하는 별로 예기치 않았다. 자신이 신세를 지고 있는 장소의 특수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일단 필사적으로 숨겨야만 했던 자신의 위치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인사만 하고, 지나가려 했는데 원장의 딱 한 마디가 세하를 불러 세웠다.

 

 “세하 리(Seha Lee).”

 “...”

 “맞죠? 당신의 이름.”

 

 세하는 도대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여기서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수도원에서 쫓기게 되느냐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세하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구르는 와중에, 원장은 쐐기를 박는 말을 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숨길 필요는 없어요. 우연찮게 보게 되었거든요.”

 “보다니요?”

 “당신 쇄골에 있는 수레바퀴 문신이요.”

 “...”

 

 세하는 무의식적으로 문신이 있는 부근에 손을 올려 쓸어내렸다. 그 위치가 딱 원장이 문신을 본 위치였기에, 원장이 다시 말했다.

 

 “시인하시는군요.”

 “그렇게 정확하게 말하시는데 반박할 그릇이 없군요. 그렇다면 저도 물어보겠습니다. 이 문신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계신가요?”

 “귀족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뒷세계와 조금 많이 가까웠던 귀족의 후계자였죠.”

 

 ‘뒷세계라는 말이 나오자 세하는 자신의 패배를 완벽하게 시인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자에게, 섣부른 거짓말은 독이 될 뿐이다. 이럴 때에는 이 사람의 앞에서만이라도 그저 솔직해지면 되었다.

 

 “그렇다면 제 정체를 당연히 아시겠군요.”

 “저희 아버님과 당신의 어머니께서 서로 거래를 많이 했었지요. 그렇다 보니 다른 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여전히 당신의 조적은 베일에 싸여 있으니까요.”

 

 저게 정석이었다. 조직의 보스, 즉 세하의 어머니는 대담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로 진중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세하의 조직이 비밀리에 강하지게 된 것에 한몫을 했다.

 

 “문신을 보자마자, 그 조직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고만 처음에는 생각했지만, 설마 후계자일 줄이야...”

 “...비밀입니다.”

 “압니다. 이건 도저히 세상에 떠오르게 할 수 없는 주제이니까요.”

 

 원장은 팔짱을 끼고서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장의 시선을 따라가니 광활한 지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세하는 원장과 같은 시선을 가지고 물었다.

 

 “그러는 저도 묻고 싶군요. 어째서 여기 수도원에 계신 겁니까?”

 “뻔한 사연이기는 한데, 간단해요. 가문이 몰락 당했거든요.”

 

 전혀 간단한 사연이 아니다. 귀족이 몰락하는 이유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전혀 웃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원장의 말투는 의외로 담담했다. 오히려 후련하다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세하의 눈빛을 읽었는지 원장이 말했다.

 

 “동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썩었던 가문이라고 생각했고, 친아버지도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양아버지가 절 여기로 쫓겨나게 했으니 잘 된 일이지요. 그 덕택에 저는 화마를 피했으니까요.”

 “...”

 “그 후로 알았습니다. 신께서는 확실히 존재한다는 걸. 그리고 신께서 구해주신 이 목숨, 평생토록 받치며 살아야겠다고. 그래서 지금은 이 수도원의 바이올렛이라는 이름의 수녀로서 살아가고 있지요.”

 

 세하가 지금까지 들었던 원장의 목소리 중에서 제일 활기찼다. 아마 바이올렛은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세하는 깨달았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구나.

 

 나는 항상 이 삶을 저주하고 사는데. 바이올렛이 또 다른 운을 띄웠다. 유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율리아 자매님은 상냥합니다.”

 “압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또한 순수합니다.”

 “그 점도 잘 압니다.”

 

 세하는 자연스레 유리가 떠올랐다. 이 수도원에서 지내는 동안 거의 유일한 낙이라고 할 수 있는 유리의 따스한 미소. 바이올렛은 유리의 이야기가 나오자 세하의 눈빛이 따사로워진 걸 알아차렸지만, 차갑게 경고했다.

 

 “그러니 자매님을 상처 입히지 마세요.”

 “...”

 “내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

 “그 점만 잘 약조한다면 이곳에 머무르는 것에 큰 개입은 하지 않겠습니다.”

 

 명백한 경고, 위협이었다. 세하는 이때까지 수많은 협박을 받아왔지만, 바이올렛의 이 경고는 길이길이 기억에 남을 듯 했다. 그만큼 바이올렛의 경고는 식은땀이 저절로 흐를 정도였다.

 

 세하가 말했다.

 

 “원장님은 율리아 수녀님을 무척이나 아끼시는군요.”

 “...당신도 그렇잖아요.”

 “...?”

 “당신도 그렇잖아요.”

  

 제가 모를 줄 알았나요? 바이올렛은 또 다른 느낌의 위협을 두 눈에 담았다.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성은 바이올렛의 이 말을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싶어 했지만, 그러기에는 세하가 지금 자신이 처한 처지가 너무도 비참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에.

 

 바이올렛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

 “내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걸 잘 알지만...”

 

 바이올렛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당신은 죄인이니까.”

 “...”

 “이 이상, 선을 넘지 마십시오.”

 

 바이올렛은 세하의 가슴을 꾹 누르고 그대로 가버렸다. 하필 손가락으로 툭- 치고 가버린 부근에는 그 지독한 문신이 있었다. 문신을 새긴지는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문신을 새겼을 때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세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답다고 찬양하던 풍경마저도 이제는 자신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 뿐이었다.

 

 

 

* * *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유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형제님을 뵙지 못했다. 평소처럼 장작을 패고 있는 장소에 있으면 오실 거라 생각했는데, 세하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유리는 이런저런 이유를 추측해보았다.

 

 ‘왜지? 어디 또 아프신가?’

 

 폭풍우 치는 밤에, 바다에 떠밀려왔던 것이 며칠 전의 일이니 몸이 또 아플 수 있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걱정부터 앞서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유리는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유리는 세하가 머무르고 있는 방으로 남몰래 향했다. 딱 하루 못 본 것뿐인데, 이렇게 싱숭생숭한 것이 참말로 이상했다. 유리는 긴장이 되었는지, - 자신이 왜 긴장이 되었는지는 본인도 몰랐다 -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노크를 했다. 이 정도의 예의는 필수였다. 그렇게 정박자의 노크를 했는데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문고리를 잡자 매끄럽게 돌려졌다. 문이 안에서 잠겨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세하가 없었다. 유리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렇게 세하가 갈만한 곳을 넓지 않은 수도원 속에서 이리저리 다니는데, 하필이면 바이올렛과 마주치고 말았다. 바이올렛은 늦은 밤 순찰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길을 찾기 쉬우라고 휴대용 등불을 오른손에 들고 있는 상태였다.

 

 “율리아 자매님?”

 “, 원장님!”

 “이 밤중에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요?”

 “, 그게...형제님이! 사라지셨어요!”

 

 이름이 아닌 저런 막연한 호칭을 부르면 못 알아들을 이도 있었겠지만, 여기는 수녀들만이 사는 수도원. 남자라고는 그 이방인 한 명밖에 없었다. 바이올렛은 세하가 사라졌다는 말에 어느 정도의 유추를 했다. 세하는 스스로 사라진 거라고. 아니면 그의 동료들이 자신과 대화를 나눈 후에 데리러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리의 말에 바이올렛이 대꾸했다.

 

 “, 그러시군요.”

 “...원장님?”

 

 사람이 없어졌다는데도 의외로 차분한 말투였다. 태연한 바이올렛의 태도는 유리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세하가 외간 남자든, 마피아의 후계자이든 어느 쪽이든 수도원에 오래 둘 수 없는 처지 사라졌다는 말에 바이올렛은 안도감부터 느낀 자신에게 매우 놀라워했다.

 

 저절로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었다. 유리는 바이올렛이 세하를 찾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않으리라는 걸 빠르게 알아차렸다.

 

 “전 좀 더 형제님을 찾아볼게요. 몸도 성치 않으신데, 어딜 가셨는지...”

 “그 사람이라면 괜찮을 테니, 자매님께서는 들어가서 쉬세요.”

 

 바이올렛은 이참에 유리가 세하와 연을 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몸도 성치 않다는 저 말에 묘하게 반박해주고 싶었다. 그 사람은 어디에 가든 살아남는다. 유리는 모를 것이다. 세하가 폭풍우 속 바다에서 살아남은 이유를. 그저 운이 좋아서?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세하의 몸은 일반인들과 다르게 특별하다. 누구보다도 즐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고, 차원이 다른 힘을 구사할 수 있었다. 전문 용어로 이인(異人)’ 이라고 하는데, 이인의 숫자는 백 명 중에서 한 명이 나올까 말까이다. 그리고 세하가 후계자가 된 이유도, 단순히 지금 보스의 친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이인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바다에서도 살아남았는데, 그에 비하면 훨씬 따뜻한 5월의 밤공기를 못 버틸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바이올렛은 잠깐 삼천포로 빠졌다. 그러면 이인을 상대로 협박을 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일까? 협박이 잘 통해서 망정이지, 까닥 잘못했다가는 이 수도원에 불이 났을지도.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는 제 갈 길을 끝까지 잘 고수했다.

 

 “제 손님이 사라졌는걸요? 손님에게 해가 입히진 않았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요.”

 “자매님...!”

 “조금만 더 찾아볼게요. 원장님은 먼저 들어가세요!”

 

 유리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바이올렛은 그런 유리를 잡지 못했다.

 

 유리는 세하를 향해 손님이라고 칭했다. 유리는 남의 단점을 잘 찾아보지 않는다. 감이 좋기에 마음만 먹으면 금방 상대방의 험담을 할 만 한 거리를 금방 찾을 텐데, 유리는 구태여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유를 바이올렛은 바로 알았다. 이건 바이올렛이 직접 세하에게 말한 거리이기도 했다.

 

 유리는 상냥하니까, 유리는 순수하니까. 유리의 상냥함을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바이올렛은 그런 유리의 사랑스러움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그럴 처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세하에게 섣불리 공격을 가했다. 유리를 만나고 나니, 오늘 낮에 했던 일을 바이올렛은 후회했다.

 

 유리는 말로는 조금만 찾겠다고 했으나 한참을 세하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끝에 가서야 유리는 드디어 세하를 찾았다. 유리가 찾은 세하는 달을 보고 있었다. 말도 없이 어디에 가버린 것이 아니라는 걸 눈앞에서 확인한 유리가 일단 들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유리는 천천히 세하에게 다가갔다. 세하는 누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유리가 바로 옆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세하는 그제야 유리의 존재를 인지했다.

 

 “...유리 수녀님.”

 “형제님, 밤공기가 차갑습니다. 어서 들어가시는 게...”

 “...조금만 더 달을 보고 싶습니다. 조금만 더 보고 곧 들어갈게요.”

 

 유리는 세하의 말에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유리는 오히려 세하의 손을 꼭 잡았다. 갑작스러운 온기에 세하는 움찔거렸다.

 

 “그럼 저도 같이 구경할게요. 혼자서 하는 달구경보다는 둘이서 같이 하는 달구경이 더 좋을 테니까요.”

 “둘이...같이...”

 

 세하는 유리의 이 따뜻한 제안을 거절할 힘이 없었다. 아까 전부터 쭉 혼자 보던 달은 처량하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래도 조금은...

 

 아니지, 아니야. 이러면 안 돼. 세하는 자신의 사고를 인위적으로 차단했다. 그에 앞서 바이올렛이 낮에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이견에 반박할 기력이 없었다. 어쩌면 세하 자신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생각했던 것이었기에.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세하가 조용히 유리를 불렀다.

 

 “유리 수녀님.”

 “, 형제님.”

 “한 가지 고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을 꺼내면 당신은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놀라워할까, 아니면 경멸할까.

 

 “저는...죄인입니다.”

 “...”

 “회개하지 못할 죄인입니다...”

 

 난 차라리 당신이 날 경멸했으면 좋겠어...그럼 쉽게 이 마음을 접을 수 있을 터이니. 세하는 그렇게 기도했다.